배포일 2017.12.15

이제 두 분에 대해 좀 더 알아보고자 합니다. 두 분은 어떻게 해서 서체 디자인을 처음 시작하게 되셨나요?
양: 저는 그래픽 디자인의 도구로서 글자를 그리기 시작했고, 제가 원하는 공부를 하기에 적합하다고 판단해서 에칼로 가게 됐습니다. 아트디렉션 석사과정에서 ‘서체 디자인 교육을 받을 수 있다’ 정도의 정보는 알고 있었지만, 막상 가보니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체계적으로 서체 디자인을 공부할 수 있는 커리큘럼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전문적인 서체 디자인 교육을 받으며 자연스럽게 서체 디자인 분야로 집중하게 된 것 같습니다.
장: 그냥 그림이 좋아서 디자인과에 진학했는데 막상 가보니 재미가 없더라고요. 본질을 과장하거나 포장하는데 필요한 기획과 스킬을 공부하는 느낌이랄까. 디자이너라는 게 마치 남들 속이는 방법을 연구해서 돈을 버는 직업처럼 느껴졌습니다. 이후 2008년 ‘한글스승전’에서 최정호 선생님의 원도를 직접 보게 되었는데, 여타 디자인 작업들과는 다르게 ‘진중하다’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마치 최정호 선생님께서 ‘어서 와. 이런 건 처음이지?’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어요. 3학년 때 서체 디자이너로 진로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레터링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장 디자이너님은 서체 회사에서 오랜 경력을 쌓으셨고, 양 디자이너님은 스위스로 유학을 다녀오셨습니다. 회사와 유학, 서체 디자이너를 꿈꾸는 많은 학생들이 이 두 가지 길에 대해 고민이 많을 텐데요. 두 분의 경험을 토대로 각자가 걸어온 방향에 대한 생각과, 더 나아가 서로를 보며 느껴지는 두 방향의 장단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양: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친구들과의 교류가 그 어떤 교육보다 저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활자를 대하는 관점에서도 굉장히 새로운 접근 방식이나 태도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친구들과의 교류는 저의 작업적인 부분이나 삶의 태도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타국에서의 삶은 불편함의 연속이지만 긍정적으로 바라보면 새로운 영감과 경험의 연속이었습니다. 한국에 와서는 장수영 디자이너와 함께 일하면서, 그를 통해 전문적인 서체 디자이너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런 체계적인 프로세스는 회사 생활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또 학교 후배인지라 옆에서 간접적으로나마 회사생활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장: 진로를 고민하는 학생들의 입장에서 말씀드리면, 한글이나 영문 어느 쪽이든 서체 디자이너를 희망하는 그들에게 좋은 여건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한글 서체 디자인의 경우, 대학교 정규과정에서 한글 서체 디자인을 채택하고 있는 곳이 거의 없습니다. 저 또한 대학생 때는 독학으로 한글 서체를 공부했고, 보다 전문적으로 배우기 위해 서체 회사에 취업하게 되었지만 경제적으로 만족할만한 직장생활은 아니었습니다. 로만체 디자인의 경우, 유학은 노력하면 갈 수 있지만 현지의 서체 회사에 취업하는 것은 비자 문제 때문에 현실적으로 힘든 일입니다. 양희재 디자이너도 이 문제 때문에 유학 당시 저와 많은 대화를 했었고, 결국 양장점이라는 대체적 방법으로 한국에서 로만체 디자인을 지속해나가는 쪽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장 디자이너님께서 서체 회사 재직 당시 진행하셨던 대규모 서체 프로젝트와 독립 디자이너로서 진행하고 있는 서체 프로젝트와의 차이점이 있을까요?
장: 주어진 일을 한다는 것과 스스로 일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동기부여를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있지, 작업적인 부분에서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저는 여전히 한글 서체를 만들고 있으니까요. 다만 외부적인 환경으로 인한 차이는 있습니다. 시장경제에 충실할 수 밖에 없는 기업의 특성상, 회사 소속 디자이너일 때에는 주어진 프로젝트를 깊이 있게 연구할 수 있는 조건이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한글 서체라는 우물 안 경쟁 속에서 서체 회사는 비용과 일정에 제약을 받고, 이러한 시장 상황으로 인해 서체 회사들이 받는 압박이 소속 디자이너의 작업이나 연봉에까지 고스란히 전가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런 면에서 재직 당시에는 정해진 월급은 받지만 작업적인 만족도가 낮았고, 독립 디자이너로서는 작업적인 만족도는 높은데 생계를 고민해야 하는 차이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서체 분야 뿐만 아니라 또래의 모든 디자이너들이 현실적으로 고민하는 부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최근 들어 서체 디자인 유학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었습니다. 실제로 올해 많은 전공자들이 지원했다고 들었고요. 양디자이너님께서는 스위스 로잔에 위치한 에칼의 아트디렉션 내 타입디자인 과정(*현재는 타입디자인 단독 과정으로 분과)을 마치셨는데요, 지원하셨을 당시 국내에 비교적 잘 알려진 헤이그와 레딩이 아닌 에칼을 선택하신 이유와 공부하시면서 느끼셨던 그곳의 경향, 또는 교육과정의 주안점 등에 대해 간단히 설명 부탁드려요.
양: 유학을 준비하고 있을 때 저는 서체 자체에 대한 관심보다는 새로운 서체가 사용된 그래픽디자인 결과물에 보다 흥미를 느꼈던 것 같습니다. 에칼을 졸업한 학생들의 작업이 제가 추구하고 있는 방향과 가까워 보였고, 그 곳 출신 디자이너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아트디렉션 과정은 그래픽 디자인 혹은 사진 전공자들로 구성되며, 이러한 조합의 구성원들이 서로 팀이 되거나 협업하면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단순히 서체를 만드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제작한 서체를 활용하는 방법까지 연구할 수 있다는 점도 학교 선택의 이유가 됐습니다.

양희재 디자이너가 제작한 서체 ‘Actual’

양희재 디자이너의 ‘It’s my private tool box.’

양희재 디자이너가 제작한 서체 ‘Fifty’
양 디자이너님께서 그동안 작업해 오신 포트폴리오를 보면 단정하게 정리된 산세리프 서체에 대한 애정이 물씬 느껴집니다. 이것은 비단 양 디자이너님뿐만 아니라 같은 학교에서 수학한 분들이 작업하신 서체에서도 두드러지는 성향으로 보이는데요, 특별히 학교에서 이런 방향을 의도하는지 궁금합니다.
양: 스위스 그래픽 디자인의 경향과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스위스 인터내셔널 스타일 시대의 작업들을 좋아합니다. 모더니스트 운동의 일환이었던 이 그래픽 디자인 스타일에 대한 저의 취향이 작업에도 반영되는 것 같습니다. 지금의 스위스 디자이너들이 작업을 말할 때 그 시대를 언급하지 않지만 한 시대의 스타일을 이끌었던 그들의 역사가 자연스럽게 묻어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장 디자이너님은 한글, 양 디자이너님은 라틴 파트를 담당한다고 하셨는데요. 멀티링구얼 타입디자인이라는 것이 엄청난 의견 조율 속에서 진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두 분이 작업하는 과정에서의 호흡은 어떠한가요? 서로의 포지션에 대한 욕심이나 또는 아직 대중에게 공개하지 않은 두 분 각자의 한글/라틴 스케치를 가지고 계시나요?
양: 저희의 호흡은 다릅니다. 맞추려고 하지도 않고, 맞춰지지도 않습니다. 저희는 서로의 작업을 존중하고, 서로를 설득할 수 있는 아이디어와 결과물로 조율합니다. 각자의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서로에게 필요한 부분을 협업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시작 단계에 있는 라틴 서체 프로젝트가 몇 가지 있습니다. 한글로 파생 가능성이 보인다는 장수영 디자이너의 피드백이 있어서 한글로도 제작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장: 영문보다 한글이 글자 수가 훨씬 많고 제작기간도 길다 보니 바꿔서 작업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가끔 합니다. 머릿속에 막연하게 그려놓은 스케치는 몇 개 있습니다. 뇌에서 명령한지 한참 된 것 같은데 아직 손까지는 전달되지 않아서 보여드리진 못합니다.
서체를 만들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부분이나 작업하시면서 반드시 지키는 본인만의 원칙 또는 습관이 있을까요?
양: Well drawing.
장: 그럼 전 Well structure.
서체 디자인이라는 것이 굉장히 긴 호흡을 가진 예민한 작업이라 할 수 있는데, 그동안 작업해 오시면서 서체를 바라보는 관점이나 자세, 또는 디자이너 정체성 등에서 어떠한 변화를 거쳤는지 궁금합니다.
양: 저는 아직 변화를 거칠 정도로 경험이 오래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서체는 디자이너의 캐릭터를 가지고 있는 작업이고 그 캐릭터를 소비자가 선택해 주는 것이라는 게 현재의 제 관점입니다. 따라서 독립 디자이너로 서체를 만들어감에 있어 디자이너의 캐릭터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어디에도 없는 ‘양장점만의 것’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장: 서체 디자이너를 지망하는 학생들과 상담할 때마다 ‘왜 자진해서 고생길을 택하나’ 우스갯소리를 합니다. 그만큼 국내 서체 시장 상황은 좋지 않습니다. 공수는 많이 들어가는데 단가는 낮고, 그런데도 시장 내 경쟁은 점점 과열되는 양상입니다. 물량공세를 통해 시장에서의 입지를 선점하려는 업체들 간의 경쟁은 제작기간을 단축시켜 소속 디자이너들을 더욱 압박하고, 결국 이렇게 만들어진 저품질의 서체는 대중의 보편적인 미감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최정호 선생님의 작업을 동경하며 이 업계에 발을 들인 한 사람으로서 이러한 상황이 매우 안타깝고, 한편으로는 서체의 질적 향상을 위한 양적 팽창을 해나가는 단계라고 위안도 해봅니다. 양희재 디자이너와 함께 팀으로 활동하면서부터는 이러한 시장 상황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동기부여가 되고 있음을 느낍니다. 현재 상업적인 디자인 결과물에서의 한글 서체 사용이 객관적 완성도를 담보로 하지 않는다는 것은, 저희가 시도해볼 수 있는 일이 아직은 많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저희의 결과물을 통해 사용자들을 차근차근 설득해나가다 보면, 언젠가는 새로운 유형의 실력 있는 서체 디자인 스튜디오로 자리 잡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그렇다면 지난 작업 중 가장 애착이 가거나 혹은 아쉬움이 남는 서체 작업이 있을까요?
양: 과거에 작업한 모든 서체 파일을 열면 고치고 싶은 점들이 보입니다.
장: 아무래도 모든 것이 처음이었던 ‘격동고딕’이 가장 애착이 갑니다. 형편없는 영어실력으로 구글, 어도비와 메일 주고받느라 정작 작업시간이 모자랐던 ‘본고딕’이 가장 아쉽습니다.

장수영 디자이너가 제작한 서체 ‘격동고딕’

장수영 디자이너가 제작한 서체 ‘본고딕’

잡지 ‘미스테리아’를 위해 장수영 디자이너가 제작한 레터링
펜바탕 외에 두 분께서 진행하시는 프로젝트나 또는 외부 활동(강의 등)이 있으신가요?
양: 충북대학교 시각디자인과에 출강하고 있고, 최근 한글타이포그라피학교에서 라틴 알파벳 워크숍도 시작했습니다. 소수의 그래픽디자이너들을 대상으로 서체 디자인 교육을 진행하는 것에 대해서 장수영 디자이너와 논의 중인데, 사무실 이전 후에 좀 더 구체화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요즘 저의 고민은 사람들 앞에서 같은 말을 수차례 반복하는 습관을 고치는 것입니다.
장: 2015년부터 디노마드학교에서 서체 디자인 강의를 진행하고 있고, 9월부터는 파주타이포그래피학교(PATI)에서도 가르치고 있습니다. 기업이나 대학교 특강도 요청이 오는 대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소규모 서체 디자인 스튜디오의 개념이 아직 국내에서는 생소한데요, 그로 인해 서체 디자이너를 꿈꾸는 많은 이들이 앞으로 두 분의 행보에 기대를 가지고 바라볼 것 같습니다. 또한, 국내 폰트업계의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경제적인 존립 문제에도 고민이 많으실 텐데요. 영세한 내수 시장 하에 여러 회사가 각종 서비스와 판매 정책으로 경쟁하는 상황 속에서 양장점만의 차별화 전략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장: 기존과는 다른 콘셉트의 완성도 높은 서체를 제시하는 것을 전제로, 보다 차별화된 홍보 방식에 집중할 예정입니다. 서체 회사들의 물량공세를 비집고 양장점이 독립 스튜디오로서 성공하려면, 그들과는 다른 홍보 방식을 통해 저희가 제시하는 서체와 가격에 대한 당위성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서체를 만들고 판매하는 이분법적인 관습에서 벗어나 기획 단계부터 제작 과정, 홍보와 판매까지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시스템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서체를 다 만들고 나서야 방안지에 베낀 스케치 이미지로 거짓된 전문성을 홍보하는 것이 아닌, 제작 과정 전반을 소비자와 공유하고 함께 호흡하는 구조를 만들고자 합니다. 제작자가 얼마나 심도 있게 고민하고 디자인했는지에 대해 소비자들로부터 인정받으려면, 그만큼의 혹은 그 이상의 심도 있는 설득이 뒷받침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이번 펜바탕 전시회 또한 본문 조판에 적합한 서체라는 것을 강조하는, 차별화된 홍보 방식의 일환이라고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양: 양장점에서 제작되는 로만체를 단순히 한글 서체의 서브 역할에 묶어두지 않고, 라틴 알파벳을 사용하는 다국적 디자이너들을 상대로 로만체만 따로 판매하는 사이트 맵을 구상 중입니다. 예를 들어 펜바탕의 로만체가 장수영 디자이너의 한글과 톤을 맞추기 위한 타협점이었다면, 한글을 배제한 도구적 해석을 통해 또 다른 맥락의 펜바탕 로만체도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시아에 근거지를 둔 로만체 디자이너로 자리 잡는 것이 개인적인 목표 중 하나입니다.
궁극적인 목표라 해야 할까요. 앞으로의 계획과 방향에 대해 한 말씀 부탁드려요.
장: ‘양장점’은 스튜디오 이름 그대로 라틴 알파벳을 디자인하는 ‘양’희재와 한글을 디자인하는 ‘장’수영이 제작한 서체를 판매하는 상‘점’입니다. 양장점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한국에서, 서체로, 밥벌이’인데요, 풀어서 얘기하면 ‘비집고 들어갈 틈도 없을 만큼 작디작은 시장규모의 이 땅에서, 저작권에 대한 개념도 생소한 서체를 정확히 알리고 판매하여, 반드시 대대손손 잘 먹고 잘 살겠다’ 정도로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단기적으로는 현재 제작 중인 ‘펜바탕 Regular’를 양장점 사이트에서 판매할 계획이고, 내년에 ‘펜 시리즈’ 중 나머지 3종(펜바탕 Semibold, 펜돋움 Thin, Heavy)에 대한 제작을 완료하고 출시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3종에 대해서는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를 통해 예약 할인 판매 형식으로 후원도 받을 예정이니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오늘 이렇게 좋은 시간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양, 장: 감사합니다.
[디자이너를 만나다]서체 디자인 스튜디오, 양장점 - 펜바탕 in Use가 계속됩니다.
